한국과 팔레스타인은 많은 역사적 맥락을 공유한다. 식민지 점령, 냉전으로 인한 분단, 미 제국주의 및 군사주의와 대중, 노동자, 학생 중심 저항 운동까지. 이 글에서는 양국의 역사적 비극과 운동의 유사점을 짚고, 한국 내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조직이 처한 어려움, 현재 한국 내 팔레스타인 운동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한국과 팔레스타인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이후 명시적인 식민 지배에서 점령지로 전환되는 경험을 했다. 영국(1922-1948)은 팔레스타인에서 명목적인 철수 후,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를 조성(팔레스타인 분할 포함)함으로써, 유럽 열강이 외면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노를 유럽 밖으로 향하게 하고, 더 핍박받던 아랍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로 게토화를 외주화하였다.
한편, 한국의 일본 제국주의(1910-1945)로부터 독립하는 과정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게된다. 한국의 끝없는 독립운동이 있었음에도, 동서의 제국주의 국가(미국과 소련)가 분할통치하고 각자 이해관계에 따른 위성국가를 세움으로써 냉전시대에 최전선을 형성하게 하여 주류 세계로부터 게토화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자발적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한국을, ‘근대화’를 명분으로 강제로 병합하고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 근대화로 인한 부는 모두 일본에게 돌아갔다. 게다가 해방 후 남북한 모두 일제강점기 중 일어난 수많은 인권 침해와 학살, 강제 노역(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사과받지 못했다. 패전국가 일본에게 충분한 사과나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친일파를 앞세움으로써 일본의 사과나 반성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반공주의를 이유로 독립운동 세력과 민중을 탄압하였다. 그 대표적인 폐해가 제주 4.3 봉기이다.
제주도민들이 48번째 3.1 운동 행진을 마치고 해산하던 중, 한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에 짓밟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폭발적으로 항의하며 경찰서로 경찰들을 쫓아갔으나, 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쐈다. 이 사건은 전면적 파업과 4.3 제주 항쟁을 촉발하였다.
한편, 동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영국 식민 세력이 철수했지만, 그 뒤를 따른 것은 불법적으로 형성된 시온주의 국가와 이스라엘 정착민들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아랍 인구가 90%이고 이들이 99%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Shlaim, 1998:4) 정치적 시온주의(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운동)가 확산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방 권력은 위와 같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하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영국의 위임 통치와 시온주의 국가 건설안을 거부했음에도, 1917년의 발푸르 선언은 영국의 식민 점령과 시온주의적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에 대한 공식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이는 유대 민족에 대한 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인도에 이르는 식민주의적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통제는 이집트 국경에 있는 수에즈 운하와 인도로 향하는 무역로 확보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7년 인도 독립법 통과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적 이익이 사라지며 영국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비용이 더 크다고 여겼고, 따라서 영국은 UN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결정권을 위임했다(Rafeedie, 2020).
제주도민들은 1948년 5월 10일, 미국이 남한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승만의 선거가 한반도 분단을 확실시할 것으로 판단, 집단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총파업과 5.10 선거 불참여가 남한의 단독 정부 건설을 방해하기 위한 공산주의 세력의 음모라고 결론지었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제주도 경찰들은 이러한 미군정 지원을 받은 이승만 정권의 태도에 수긍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저항(제주도민들 탄압 거부)하였으나, 본토에서 추가 파견한 경찰과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이를 압도해, 경찰 등 행정사법기관을 장악하였고, 대규모 탄압과 학살이 진행되었다.
한편, UN은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을 발표했고, 정치적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는 미국과 소련의 지지로 달성되었다. 이 결정은 팔레스타인의 인구 7퍼센트도 되지 않는 시온주의자들에게 땅(주요도시, 비옥한 토지)의 55%를 부여하는 결정이었다. 위 UN 결의안 아래 시온주의 국가 확장을 기대하며, 시온주의 세력은 영국 위임 통치가 끝나는 1948. 5. 15. 전에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이스라엘’에 주어질 땅을 점령했다. 팔레스타인들은 군사적 침략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주를 거부했고, 1948년 아랍 해방군과 정규군이 시온주의 확장 저지를 위해 도착했다. 이에 시온주의 세력은 급히 팔레스타인인을 쫓아내기 위해 미국 시온주의 연합의 “플랜 달레트”를 채택했다.
제주도 학살은 1954. 9. 21까지 7년 7개월 동안 제주인구의 10%인 약 3만 명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고, “초토화 정책” 아래 마을과 인구 밀집 지역이 표적이 되어 불태워졌다. 10월 11일에는 보안사령부를 세워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사람은 반군으로 규정해 처형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군경 세력은 산간 지역 마을을 불태우고 거주민들을 학살했다.
플랜 달레트는 1948년 4월에 시작되었다. 시온주의자 민병대가 수행한 군사 작전은 팔레스타인 인구 밀집지를 표적으로 삼아,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1948. 5. 14.까지 2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며 175,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난민이 되었다. 마을을 표적삼아 불태우고 거주민들을 체포하고 저항할 경우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총 400개가 넘는 마을의 사람들이 사라졌으며 700,000명의 팔레스타인인(전체 인구의 약 80%)이 난민이 되었다. 이것을 낙바라고 부른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과 낙바 당시의 학살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주목할 점은 팔레스타인과 한국 모두에서 마을을 표적으로 삼아 불태우고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살해하는 유사한 전술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과 제주의 사람들 모두 ‘결탁한 세력에 의한 집단 학살 전략’이라는 비인도적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
한국에서는 국민들의 지적 쇄신이 이루어지면서, 반민주화, 반인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이 늘어났으며,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희생되었다. 군사독재자 전두환이 직선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 운동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키면서 6·11 항쟁(6월 4일 항쟁)이 일어났다. 학생, 노동자, 야당 정치 단체들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는 절정기에 전국에서 하루 100건이 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사회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6월 봉기로 독재정권은 두려움에 대통령 직접 선거제를 채택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고, 1987년 여름에는 노동자의 약 1/3이나 참여한 대규모 노동자 쟁의로 이어졌다. 이는 1995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온주의의 아파르트헤이트 통치와 점령, 그리고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대한 억압이 확대되면서, 제1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이스라엘 군용트럭이 차량을 들이받아 가자지구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부당하고 잔혹한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16세의 하템 알시시가 총에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는 난민촌에서 시작하여 젊은 학생들이 주도하였고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하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통치 기구로 하는 자치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대규모 체포, 3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실탄 사용, 검문소 설치, 학교 폐쇄 등 ‘철권 정책’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자치 정부 수립을 향한 진전을 이룰 때까지 투쟁을 계속했다(Heacock, 2020).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건설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인티파다가 발생했으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집단 학살의 위협에 직면한다. 한국의 노동자, 소수자, 그리고 학생들은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다.
BDS 운동은 팔레스타인 연대를 위한 국제적 운동이고, 반식민주의, 반자본주의, 상호연결성이 기반이다. 이 운동을 통해, 사람들은 식민 집단인 이스라엘에 저항하며 피식민 집단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한다.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집단 학살이 기업들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폭탄과 군사 자원에 대한 수요를 자본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BDS 운동은 집단 학살의 자본주의적 방식을 저지하고, 형식적 자본주의적 질서에 반대한다. 또한 우리 연대대는 상호 연결로 위계와 불평등을 반대하고 해체한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이 우리 억압에 대한 해방과 연결되어 있기에 소외된 약자자(marginalized communities)는 투쟁의 상징인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구축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떤가? 한국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가들이 진행하고 있는 BDS 운동 중 주요 대상이 HD 현대기업과 KNOC 이다. HD 현대기업은 이스라엘 방위군에 건설 장비를 수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UN 인권 특파원 프란체스카 알바니즈의 보고서에 HD 현대의 건설 장비 수출이 이스라엘의 집단 학살과 불법 정착촌 건설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고 명시했다. 더해서, HD 현대는 국제앰네스티가 반복적으로 장비가 사용되고 있는지를 질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고 물품이라고 답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KNOC(한국석유공사) 또한 BDS 운동의 주된 대상 중 하나이다. 한국석유공사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여러 해외 자회사 중에는 영국의 ‘다나 페트롤리엄’이 있는데, 다나는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팔아넘긴 팔레스타인 해역의 가스전 탐사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 탐사권으로 한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해역에서 우선권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에 집단학살, 군사점령,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지속하는 돈을 지불한다. 우선권이 부여된 구역 62%가 팔레스타인 해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의 사업이 국제법을 심각하게 위반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에, 한국석유공사의 가스전 프로젝트는 팔레스타인의 인종차별과 집단 학살에 자금을 대는 전쟁 범죄 공모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기업에 대하여 BDS 코리아와 팔레스타인 시위대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에 대한 보이콧과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 시민 사회 내에서, 학생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이 두드러지게 활동하게 있는데, 한국학생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반식민주의, 한국적 맥락과의 연결, 국제주의를 주력으로 한다. BDS 코리아랑 연대하며 팔레스타인 영화 상영, 자료 조사와 포럼 개최, 시민 사회 내 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해 왔다. 한국적 시위 문화와 연결한 점은 한국 학생 인티파다를 돋보이게 하는 주요한 부분이다. 친팔레스타인 학생 활동가들은 과거 한국의 집회와 운동에서 배우고, 현재 상황에 이를 적용한다. 이 관계는 팔학과 다른 학생 단체들이 한국 시민 사회와 협업하는 것을 돕는다. 결국에는 노동조합을 비롯해서 다른 한국의 활동가들을 팔레스타인 의제로 이끄는 주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국제 유학생들 또한 한국의 친팔레스타인 운동의 큰 부분이다. 국제 유학생들은 한국 좌파운동 맥락을 견지하면서도 국제주의를 바탕으로하는 국제적 움직임과 함께하는 것을 조력한다. 팔학은 해외의 많은 운동에도 연대하고(예 : 인도네시아의 투쟁) 있다. 위 세 요소를 통해 우리는 한국 시민 사회 내에서 폭넓은 연대를 만들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강화한다.
학생들은 더 나아가 학술 기관을 바꾸고 있다. 팔학을 비롯한 친팔레스타인 학생들은 이스라엘의 교육 기관을 겨냥한 폭격과 학살, “Scholasticide(스콜라사이드)”를 알림으로써 학술보이콧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 대학과 협력 기관이 이스라엘의 군대와 긴밀한 동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심지어 대량 학살까지도 계획, 적용하며 정당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학술 기관들에 대한 학문적 보이콧의 시작되었다. 각국 대학생들이 이스라엘 대학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함께 연구를 수행하지 말 것을 대학들에게 촉구했다. 팔학을 비롯한 친팔레스타인 학생 단체가 민주노총 대학원생노조나 노동연대 단체, 페미니스트 단체, 생활도서관과 연대하여 학술 보이콧운동을 진행했다. 이 학생 단체들은 스콜라사이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부터 관련 주제 세미나 및 포럼을 개최하는 것까지 구체적인 학문적 보이콧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최근 팔학 세미나에서는 학문적 보이콧이 왜 중요한지와, 다른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한국과 팔레스타인 역사에 많은 공통점이 있는데 불구하고, 그리고 친팔레스타인 좌파 운동가들이 이 주제를 주류 논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은 팔레스타인의 연대에 시큰둥하다. 특히 팔레스타인 투쟁이 미약한 국내 정서를 지닌다. 왜 팔레스타인 투쟁은 이곳 한국에서 이렇게 약할까?
첫번째로, ‘동질감’이라는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은 단일 민족 국가로서의 역사가 길어. 외모가 동질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아시안’처럼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인이라는 아주 다른 민족 집단으로 간주되고, 이에 한국인들은 어떠한 동질성도 느끼지 않는다. 지리적 거리도 영향이 있다. 팔레스타인과 함께,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여행지나 출장 일터로 덜 선호된다. 한국인들에게 아랍국가들도 멀기만 한데, 팔레스타인은 아예 관심이 없는 국가다. 이주노동자도 많지 않으며, 결혼 이주민도 매우 적다. 한국인들은 그들과 만날 기회가 없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적은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한미동맹도 하나의 원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두 나라의 관계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피를 흘려 한국을 공산주의에서 ‘구출’한 이미지와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연결로 인하여 한국 대중들은 미국을 ‘동맹 이상’으로 생각한다. 이 두 나라 사이의 친밀성은 자연스럽게 한국 언론이 팔레스타인 이슈에 대해 쓰는 기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대부분 한국 언론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파트너임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이 미국처럼 한국의 친구라고 생각하게끔 대중을 유도한다. 게다가 한국 언론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서양 언론의 기사를 단지 번역하고, 미국 눈치만 보며 어떠한 분석이나 평가도 하지 않는다.
또 미국과 남한의 내재적 반공주의가 팔레스타인 투쟁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 미국으로부터 반공사상 주입을 받은 한국의 보수우파에게 공산주의는 영원한 적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자본주의는 한국경제의 신앙으로 뿌리박혀, 반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팔레스타인 투쟁을 한국의 보수우파는 절대 지지하기 어렵고, 자본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우파에게 이스라엘은 친밀한 ‘친구’, 팔레스타인은 묵시적인 ‘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보수우파가 장악한 한국언론 또한 ‘이스라엘은 친구, 팔레스타인은 적’이라는 내재적 편향성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고, 대중은 사회-역사적 인과관계를 직시하지 않고 단순히 언론기사만 믿어 팔레스타인은 손쉽게 적이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나온다. 한국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한국 언론이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렸고, 더 나아가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적는 대신, 한국 언론은 팔레스타인 투쟁의 프레임을 왜곡한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투쟁을 단순한 종교 전쟁으로 인식되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의 삶을 폄하한다. 언론의 편향성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팔레스타인 투쟁들이 불법적 점령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라고만 (팔레스타인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이 사태는 종교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 아님에도) 생각한다. 한국 주류언론은 서구 언론이 쓴 내용을 그냥 받아쓰며( “테러리스트”, “잔혹한”, “무슬림”, “폭력적인”… ), 묵시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악마화하여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중첩된 요인들로 인해 팔레스타인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전혀 와닿지 못하고 외면당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동질성이 부족하다는 점, 이스라엘이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보수 주류 언론이 왜곡한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국 사회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무관심해지고, 따라서 연대 활동에 소극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팔레스타인 운동에는 희망이 없는가? 한계로 인해 대중의 대폭적 참여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의 좌파 진영조차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하기 어렵다다.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로서도, 여성 혐오에 맞서는 여성으로서도, 장애인 차별에 맞서는 장애인으로서도, 빈곤에 맞서는 빈곤층으로서도, 성소수자 혐오에 맞서는 성소수자로서도 팔레스타인 투쟁은 당사자성이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팔레스타인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단정 짓기는 이르다. 한국 좌파들, 그리고 BDS 한국지부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수년간 팔레스타인에 대해 대중에게 알리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보수언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팔레스타인을 테러 집단이 아닌 희생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서양과 달리 시오니즘과도 거리가 멀다. 서구의 여러 좌파 단체가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한국의 좌파는 시오니즘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이러한 점은 팔레스타인 운동이 한국에서 확산될 밑바탕이 될 것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 BDS 코리아와 같은 한국 좌파 단체들이 연대하는 한 한국의 친팔레스타인 운동은 확산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우리의 해방이다.” 이는 한국 팔레스타인 시위에서 외치는 구호 중 하나다. 이 구호처럼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의 투쟁과 우리 각자의 투쟁이 하나이며, 따라서 한 사람의 해방은 곧 다른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의 정신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이고, 팔레스타인은 우리다.
한국 학생 운동 동지들이 쓴 글입니다.







